minute by minute
파도 앞에서 모래성 쌓기
미래계획
주변 친구들이 하나둘씩 도발적인 야망과 굵직한 계획을 품기 시작했다. 사업이나 결혼을 하겠다든가, 특정 학술 분야의 선구자가 되겠다느니, 혹은 경제적 자유를 완벽히 이룩하겠다느니 하는 것들 말이다. 그들에게는 10년 뒤를 내다보는 일이 너무나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 보였다. 반면 나는 미래 계획이 너무 빈약하다는 이유로 심한 꾸중을 들어야 했다. ‘핵심 가치관을 확립하고 그 지점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계획을 세워야 한다’며 2시간 넘게 언성을 높인 즉석 강연을 견뎌야 했다. ‘세상에 어떤 일이 있어도 변하지 않을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이냐는 수차례의 질문에도 나는 끝내 대답하지 못했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통제하려고 움켜쥘수록 날카롭게 패인 자국만 남았던 순간들이 아직도 욱신거리는 탓일까. 나이의 앞자리가 바뀌었음에도 이렇다 할 무언가를 이뤄내지 못했다는 사실이 실망스러우면서도 억울하다.
opposite ends
2017년 무렵, 나는 학사경고를 받았다. 대학교 수업에 거의 출석하지 않아 대부분의 과목에서 D학점을 받았기 때문이다. 조별 과제를 함께했던 학우들은 물론 친구들과의 관계도 많이 어긋났다.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랬던 게 아니라고 믿고 싶다. 당시의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조차 버거웠다. 병원에 전화를 걸어 진료를 예약하는 일조차 스스로 할 수 없어, 결국 친구가 대신 해주어야만 했다.
그런 무력한 시기가 지나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머릿속에 생각이 많아지는 시기가 찾아온다. 지평선 너머에서 거대한 파도가 몰려오는 것을 무력하게 바라보는 기분이다. 마르지 않는 바다에 그대로 잠겨버리고 마는 것이다.
자신감이 가득 차올랐다. 자다가도 번뜩 떠오른 생각들을 메모장에 급하게 적어두고는, 다음 날 친구에게 세상에 없던 혁신적인 아이디어라고 확신에 차서 자랑하기도 했다. 베개에 머리를 뉘면 머릿속에서 여러 곡의 음악이 동시에 재생되어 들려왔고, 감은 눈꺼풀 위로는 정체 모를 실루엣들이 아른거렸다. 결국 잠을 포기한 채 밤새 책상에 앉아 귓가를 맴도는 음악들을 직접 편집하고, 머릿속을 떠다니던 실루엣들을 도화지에 그려 나갔다. 머릿속을 뒤집어놓는 모든 소리와 장면을 온전히 현실로 끄집어내어 눈앞에 구현해놓고 나서야 기절하듯 잠시 잠들 수 있었다.
shinee lucifer / katy perry 365
lady gaga rain on me / britney spears crazy
bts dynamite / mkto classic
mariah carey tmb / cardi b wap
무엇이 좋은 생각인지 고민할 틈도 없이 새로운 생각들이 쏟아져 내렸다. 무력감에 잠겼던 동안 비어버린 시간을 단번에 메우려는 마음이 강했다. 그렇게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을 벌여 나가다 결국 현실적인 한계에 이르면 모든 것을 포기하는 좌절이 반복되었다. 한바탕 소란이 지나간 자리엔 나의 것이라고 믿고 싶지 않은 수치심의 잔해들만이 남았다. 햇 결국 병원을 찾아 조울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유전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는 의사의 설명에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이름이 참 원망스러웠다. 처방받은 약은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게 내 머릿속을 쇠창살 뒤에 가둬놓는 것 같았다. 머릿속이 멍해지는 그 느낌이 싫었다. 약을 먹기 전의 모습과 비교하며 내가 멍청해졌다고 느꼈고, 그런 내 모습이 혐오스러웠다. 약물의 힘 없이 혼자 조절해 보려고 노력도 했지만, 내 상태를 객관적으로 볼 수 없으니 끊임없이 스스로를 의심해야 하는 상황이 지긋지긋했다. 약을 먹기는 싫고, 안 먹자니 또 이상한 말들을 내뱉을까 봐 시달리는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거울 속의 내가 세상에서 제일 근사해 보이고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다가도, 작은 실수 하나에 한없이 초라해 보이고 쓸모없는 사람처럼 느껴지는 자기혐오의 반복은 나를 가장 지치게 만들었다. 더군다나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해야 할 때마다 내 안의 거뭇한 부분은 도려내고 파란 부분만 솎아내어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은 나를 고립시켰다.
minute by minute
주변 사람들이 번듯한 계획을 고른 바닥 위에 다져나갈 때, 나는 당장 덮쳐오는 파도를 걱정해야 했으니, 이런 양극단 속에서 내가 내일을 쌓아나갈 수 없었던 것은 나의 부족함 탓이 아닐지도 몰라. 쓸려 내려간 모래성 앞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가 된 것처럼 느껴질 때면, 한 번에 딱 1분씩만 살아보는 거야. 그 순간들이 모여 결국 내가 사랑할 수 있는 나의 미래가 될 거라고 믿어 보는거야.